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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해군 참전용사 윌리엄 헤밀튼 쇼 추모식

데니스
2017.09.24 19:33 3,19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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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는 미국인 선교사 부부의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당시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부모님 덕분에 어린 시절을 한국에서 보낸 그는 자신을 한국인이라 생각했고한국을 조국으로 여길 정도로 한국을 사랑했다고 합니다또한평양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쳐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갖추었으며 한국인 친구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후 미 해군에 입대하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했던 쇼 대위는 1947년 전역 후늘 그리워하던 한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미 군정청 소속으로 조선 해양경비대사관학교(현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에서 교관으로 근무하며 생도들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교관으로 근무하던 중 학업에 뜻을 품은 쇼 대위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 과정을 밟게 됩니다그러던 중 6·25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2의 조국인 한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겠다며 미 해군에 재입대하게 되는데요그는 당시 한국에 있던 부모님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금 한국인들은 전쟁 속에서 자유를 지키려고 피 흘리고 있는데제가 흔쾌히 도우러 가지 않고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린 후 선교사로 가려 한다면그것은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라며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맥아더 장군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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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당시 방파제를 넘는 미 해병대

 

한국에서 나고 자라 한국어와 한국의 지리에 정통했던 쇼 대위는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최측근 보좌관인 해군정보장교로 임명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어 내는 공을 세웠습니다이후에도 그는 서울탈환작전에 직접 자원해 참전하기도 하는 등 한국의 자유 수호를 위해 앞장섰는데요그러던 중 1950년 9월 22일 아침적 후방 정찰을 위해 녹번리(현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에 접근하던 쇼 대위는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적 매복조의 공격을 받고 28세의 꽃다운 나이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전사하기 일주일 전쇼 대위는 인천상륙작전에 함께 참전했던 해군 이성호 중령(후에 제5대 해군참모총장 역임)과 나눈 대화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도 한국에서 태어났으니 한국 사람입니다내 조국에서 전쟁이 났는데 어떻게 마음 편하게 공부만 하겠습니까공부는 내 조국에 평화가 온 다음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대한민국에 묻히다.

쇼 대위는 평생 한국을 위해 봉사한 부모님과 함께 서울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되었습니다그의 묘비에는 사람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구절이 새겨져 있는데요쇼 대위의 한국 사랑을 여실히 보여주는 묘비명이 아닐까 합니다이후 그의 한국 사랑에 대한 사연을 알게 된 사람들이 뜻을 모아 1956년 그가 전사한 자리에 추모비가 세워졌고, 2010년에는 서울시 은평구 평화공원에 동상이 건립됐습니다또한쇼 대위는 우리 정부로부터 충무무공훈장을미국 정부로부터는 은성무공훈장을 각각 추서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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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호국영웅 우표의 인물로 선정되어 발행된 기념우표

대한민국을 제2의 조국이라 여기며 조국의 자유 수호를 위해 앞장섰던 윌리엄 해밀턴 쇼 미 해군 대위그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친구였습니다. 9그 누구보다 대한민국을 사랑했던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를 꼭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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